[손동주 칼럼] 그곳에 가면 - 용인 처인성

삼남대로와 영남대로가 근접한
천년 그 자리를 지켜온 작은 토성.
국가와 국민을 지켜낸
오래전 우리 선인들의 흔적이
매서운 겨울바람에 몸을 움츠려도
그 따스함이 살아있다.
용인 처인성, 역사적 전승지로서의 가치
처인성은 경기도 용인시에 위치한 평지 토성으로,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다. 이 성은 용인에서 진위로 가는 길과 수원에서 오산을 거쳐 안성으로 가는 교차 지점에 자리 잡고 있어, 전략적 가치가 매우 높았다. 성의 전체 둘레는 약 425m이며, 상공에서 보면 사다리꼴에 가까운 형태를 띠고 있다.

처인성의 축성 시기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논란이 있었다. 백제시대에 축성되었다는 설과 고려시대에 축조되었다는 설이 대립했지만, 최근 성 내부의 발굴 조사 결과 통일신라 시대의 유물이 다량 출토되면서, 최초 축성 시기는 통일신라 시대로 추정하는 것이 가장 유력하다. 이후 고려시대에 들어서면서 군사적 요충지로 기능하며 지속적으로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처인성은 고려 고종 19년(1232년) 몽골군의 제2차 침입 당시 승장(僧將) 김윤후가 처인 부곡민과 함께 몽골의 명장 살리타이를 사살하며 대승을 거둔 전투지로도 유명하다. 이 전투는 고려군이 몽골의 침략에 맞서 승리한 몇 안 되는 사례 중 하나로, 몽골군이 고려를 쉽게 정복할 수 없음을 보여준 중요한 사건이었다. 현재도 처인성 북쪽에는 ‘사장터’라 불리는 장소가 남아 있으며, 이곳이 살리타이가 최후를 맞이한 장소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처인성은 고려시대뿐만 아니라 조선 시대 임진왜란 때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왜군이 이곳을 점령했으나, 수원 독산성에 주둔한 조선 관군이 처인성에 집결한 왜군을 격퇴하며 다시 탈환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전투의 기록은 처인성이 단순한 방어 거점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중요한 전승지로서 지속적으로 활용되었음을 보여준다.


문화재적 가치와 보존 현황
처인성은 현재 경기도 기념물 제4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지속적인 보존과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고려와 조선 시대의 역사적 사건을 증명하는 유적지이자, 당시의 방어 전략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향후 체계적인 발굴과 복원 작업을 통해 처인성의 역사적 가치를 더욱 명확히 규명하고, 이를 널리 알리는 노력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