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동주 칼럼]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12
- 입력 2024.01.03 22:08

1970년대와 1980년대는 우리 대중가요의 르네상스였다.
가장 많은 장르의 음악들이 선보였고, 대학가요제나 강변가요제 등 가요제도 활발히 일어나는 시점이다. 시대 정황상 자유로운 창작활동은 힘들었지만, 여러 감시와 제재 속에서도 우리의 대중가요는 많은 발전을 이뤄냈다.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장르 발라드가 자리매김하였으며 장덕, 유재하, 김정호 등 비운의 천재 가수들이 등장했다.

그룹사운드란 명칭으로 옥슨80, 휘버스, 건아들, 활주로, 블랙샌드라, 마그마, 작은거인 등이 활동하였으며, 신중현으로 시작된 대한민국의 락은 산울림이라는 밴드로 인하여 정점을 찍었다. 80년대 들어서며 부활, 시나위, 블랙홀, 백두산, H2O 등이 대한민국 헤비메탈을 이끌었다.

세계적으로 헤비메탈은 1980년대를 지나며 사향길로 들어섰지만, 여러 장르의 헤비메탈로 발전한 것과는 달리 우리나라의 헤비메탈은 발라드를 사랑하는 우리의 정서에 헤비메탈이란 본연의 성격은 잊은 채 락발라드만을 추구하며 사향길로 들어섰는지 모른다.
80년대를 풍미했던 그룹들의 노래 중 지금도 널리 불리고 사랑받는 노래들은 강한 연주와 메시지가 담긴 정통 헤비메탈이 아닌 락발라드 혹은 메탈발라드라고 불리는 음악들이 대부분이다.

가왕 조용필의 등장은 우리 대중음악사에서 조용필을 빼고는 역사를 논할 수 없게 만들어 버렸고, 남진, 나훈아 양대산맥으로 이어오던 트로트는 주현미가 등장하며 또 다른 꽂을 피웠다.
댄스음악 위주의 나미는 김완선과 박남정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만들었고, 비운의 가수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 이영훈 작곡가와 이문세의 이문세 4집 '사랑이 지나가면' 그리고 변진섭의 등장은 우리의 대중음악사에서 발라드란 장르를 정립시켰다.
우리 대중가요의 르네상스는 전형적인 미국 음악의 영향으로 그 흐름이 흘러갔지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당시에도 우리 것을 찾으려는 시도는 지속되었다는 점이다.
1977년 고려가요인 청산별곡과 가시리를 소환한 이명우의 가시리는 대학가요제에서 은상을 수상하며 화제의 중심에 섰고, 배철수와 구창모가 포진한 그룹 송골매의 노랫말에는 다수의 우리 나라말이 첨부되었다.
1980년대 최고의 인기를 누린 김수철은 정상에 섰을 때 은퇴를 선언하고, 국악의 현대화에 앞장섰다. 그리고 태어난 것이 우리 국악과 서양악기의 만남인 ‘기타산조’이다.
김수철의 히트곡 '못다 핀 꽃 한 송이'가 대중적이었다면, 국악가요 '별리'는 김수철이 추구했던 음악의 한 주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