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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규 칼럼] 일본을 걷다

by 주간평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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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규 교수

센고쿠 시대의 영웅인 ‘에치고의 용’ 우에스기 겐신의 권력을 이어받은 우에스기 가게가쓰는 동북지방 아이즈 번 100만 석의 영주였다. 또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함께 5대로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의 이시다 미쓰나리 편에 가담했다. 전쟁 당시 동군에 가담한 다테 마사무네 등과 열심히 싸웠지만, 서군이 패하자 교토로 올라가 승리한 이에야스에게 머리를 숙였다.

전쟁에서 패한 우에스기 가게가쓰는 아이즈의 100만 석에서 다테 마사무네의 탄생지 요네자와 30만 석으로 감봉 처분을 받았다.

우에스기 가문은 의를 중요시했다. 깃발에 쓰인 상징어도 ‘毘(도울 비)’였다. 100만 석에서 30만 석으로 영지가 줄었음에도 가신들은 그대로 데리고 영지를 옮겼다. 전쟁은 사라지고 사무라이가 필요 없어졌음에도 관료를 줄일 생각 없이 과거의 번영만을 떠올리며 과도한 비용을 계속 지출했다. 결국 백성이 납부하는 쌀로만 영지를 운영하게 되었고, 곧 백성도 사무라이도 영주도 모두 가난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백성들의 눈에는 생기가 사라지고 체념의 모습만 남았다. 지출해야 하는 고정비는 일정한데 수입은 쥐꼬리였다. 에도에서도 가난한 요네자와 번은 거지 취급을 받았다. 돈을 빌리기도 쉽지 않았다. 비참해진 영주는 차라리 영지를 반납할 생각도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대를 이을 자식도 여의치 않자, 결국 지금의 미야자키현 다카나베 번에서 서양자(사위를 양자로 삼는 제도)를 들이기로 했다. 양자의 이름은 우에스기 하루노리. 9세에 요네자와 번의 양자로 왔고, 양부가 은퇴하자 17세의 나이에 가독을 이어받아 요네자와 9대 번주가 되었다.

에도 중기였던 그 시절, 상업 자본주의가 발달함에 따라 자영 농민의 위상은 무너졌고, 농촌은 크게 변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요네자와 번뿐만 아니라 동북지방 전체의 백성들이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다. 끼니 걱정에 태어난 아기를 죽이는 ‘마비키’(間引き, 영아 살해) 풍습까지 성행했다.

대기근이 빌어나자 동북지방의 백성들의 가난은 극에 달했다. 끼니 걱정으로 태어난 아기를 죽이는 ‘마비키’도 유행했다. 사진은 아기를 죽이는 엄마의 모습이다

 

절박함을 느낀 하루노리는 사무라이와 백성 앞에서 검약을 맹세하며 부인의 시종을 거의 줄이고, 무명옷을 입는 등 솔선수범을 보이기 시작했다. 선진 농업 기술 도입, 개간사업, 옻나무 심기, 돈이 되는 잉어 기르기 등으로 번정을 개혁하며 사무라이와 함께 직접 행정을 살폈다. 개혁의 피로감이 쌓여 갔지만, 그는 진심으로 백성과 사무라이를 설득했다. 그의 노력으로 번의 경제는 점차 회복되었고, 시간이 흐르자 부가 쌓이기 시작했다. 마침내 채무가 없는 상태까지 재정이 좋아졌다. 하루노리는 자조(自助)의 정신을 강조하면서도 번 차원의 원조인 부조(扶助) 제도도 활용했다.

일본 역사상 최악의 흉년으로 기록된 텐메이 기근 당시, 이웃 번에서는 수많은 아사자가 발생했지만 요네자와에서는 단 한 명도 굶어 죽지 않았다.

야마가타 현 요네자와 시에 설치 된 우에스기 요잔의 동상. 그가 설파한 전국의 사(傳國의 辭)는 1789년 인간의 기본적 권리를 위해 시작된 프랑스시민혁명의 자유사상보다도 앞선 생각이었다.

 

그는 학문에도 힘썼다. 당시 교육의 혜택은 사무라이 자제에게만 주어졌지만, 하루노리는 누구나 공부할 수 있도록 유학자를 초청해 번교를 설립하고, 실학적 학문을 장려했다. 그는 35세의 젊은 나이에 전 번주였던 아들, 즉 처남에게 가독을 물려주면서 ‘전국의 사(傳國의 辭)’라는 세 가지 원칙을 남겼다.

▲ 국가는 선조에서 자손으로 전해진 것이며, 개인의 것이 아니다.

▲ 인민은 국가에 속한 것이므로 사적인 것이 아니다.

▲ 백성은 번주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번주가 백성을 위해 존재한다.

그가 설파한 이 원칙은 1789년 프랑스 시민혁명의 자유사상보다도 앞선 개념이었다. 그는 이미 에도 중기 시절, 도호쿠 지방의 작은 번에서 민주주의의 본질을 백성들에게 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일본 기자들이 가장 존경하는 일본 정치가가 누구냐고 묻자, 우에스기 하루노리라고 답했다. 당시 일본 기자들 상당수는 그의 이름조차 몰랐다고 한다. 하지만 평생 사심 없이 번과 백성의 삶 향상을 위해 헌신한 하루노리의 삶은 미국 대통령에게까지 깊은 감명을 주었다.

존 에프 케네디 미국 대통령. 그는 일본 정치인 중 우에스기 요잔을 가장 존경했다고 한다.

김영삼 전 대통령 역시 하루노리의 삶에 감동받아, 그를 다룬 소설 『불씨』를 청와대 전 직원에게 읽도록 추천했다고 한다.

 

하루노리는 한 차례 가독을 물려주었지만, 양자의 동의를 얻어 다시 실권을 쥐었다. 백성과 사무라이 모두가 원했기 때문이었다. 존경받으면 자연스럽게 권력은 되돌아오는 법이다. 이는 오늘날 진영 논리에 매몰된 채 정쟁만 일삼는 싸구려 정치꾼들이 반드시 배워야 할 덕목이 아닐까?

하루노리는 은거 후 요잔(鷹山)이라는 법명을 사용했으며, 후대에는 이 이름으로 더욱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우에스기 가문의 마지막 다이묘는 폐번치현(봉건제의 번을 폐지하고 중앙집권적 현 제도로 개편하는 조치) 이후 영국으로 유학을 다녀온 뒤, 오키나와현의 현령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오늘날 요네자와에 가면 역대 우에스기 영주를 모신 사당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일본 3대 군략가 중 한 명인 나오에 가네쓰구가 우에스기 가게가쓰와 함께 서 있는 동상도 볼 수 있다.

참고로, 일본 3대 군략가는 임진왜란에도 참전했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을 위해 장렬히 전사한 시바 사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들의 발목을 잡았던 사나다 마사유키, 그리고 나오에 가네쓰구이다.

또한 일본 3대 소고기 중 하나로 손꼽히는 마쓰자카 소고기는 바로 요네자와에서 송아지를 사다가 키운 소고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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