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문화의 진수를 보려면 일본에 가라.’

그 말에는 ‘일본의 뿌리는 백제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일본을 여행하다 보면 전역에 백제의 역사가 깃들지 않은 곳이 없다는 점을 항상 느끼게 된다. 특히 아스카나 나라 지역, 후쿠오카나 야마구치 전역에서 유독 백제의 향기를 맡을 수 있다. 도호쿠 지방인 미야기현에도 백제의 후손인 경복왕의 역사가 서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야요이 시대인 기원전 약 300년, 가야 지방 사람들은 소빙하기 도래 등 여러 가지 이유로 현해탄을 건넜다. 고구려의 남하정책이 한창이던 기원후 400년경에도 수많은 반도인이 일본열도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 인구의 빠른 증가 속도가 이를 방증한다. 부족국가 형태의 일본이 통합된 국가로의 토대가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백제에서는 왕족과 함께 기술자, 학자 등을 대동해 일본에 선진 기술을 보급했다. 이때 아직기, 왕인박사 등이 천자문 같은 서적과 함께 일본으로 향했다. 일본 초기의 관료제도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한반도의 주류는 부여, 고구려, 백제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일본의 주류는 도래인이라 불리는 백제에서 건너간 수많은 왕족, 기술자, 농민이다. 일부 역사학자는 삼국시대 초·중기에 나주 지방에 왜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의자왕을 배반하여 나당연합군에 넘긴 웅진성의 장군 예식진의 묘비 탁본이 중국 서안에서 발견되어 큰 화제가 되었는데, 일본 고대사의 권위자 ‘도노 하루유키’ 나라대 교수는 이 탁본의 해석을 통해 ‘일본’이라는 단어는 백제를 칭하던 말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중국에서 볼 때 해 뜨는 곳이 백제였기에 가능한 추론이다.
그래서 ‘일본’이라는 말은 예부터 백제를 가리키는 표현이었고, 이후 한반도에서 백제가 멸망하고 수많은 사람이 일본열도로 이주한 7세기, 즉 40대 천무천황 때부터 백제를 의미하던 ‘일본’이라는 단어가 자연스럽게 일본열도를 칭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스토리가 가능하다면 백제는 곧 일본이었고, 왜 또한 백제의 일부분이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훗날 후백제의 견훤 세력에게 일본이 적극적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이유도, 그들이 견훤에게 백제를 계승할 정통성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며, 열도로 건너온 자신들이야말로 백제의 적자라고 인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후 후삼국시대의 혼란이 고려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모습을 보며, 한반도로의 복귀보다는 일본열도에서의 안착에 더 힘을 쏟았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 이 무렵부터 조상 땅을 빼앗긴 것에 대한 한이 커지고, 한반도에 대한 집착도 자라났을 것이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든다.

백제가 무너지기 전인 600년대 중반, 일본 조정에서는 을사의 변이 일어난다. 이는 훗날 38대 천황이 되는 나카노오에 황자가 어머니 고쿄쿠 천황(후에 재집권 시 사이메이 천황) 앞에서, 나카토미노 카마타리(후에 1,000여 년간 일본 최고의 실세가 되는 후지와라 집안의 시조)와 함께 전횡을 일삼던 소가씨의 목을 치는 사건이다. 이상훈 작가의 『제명공주(사이메이 천황)』에는, 물론 역사소설이지만, 나카노오에 황자는 의자왕의 조카라는 내용이 등장한다. 일본 황실은 물론 소가씨도 백제인의 핏줄이었고, 당시 집권세력 대부분이 백제인의 혈통이었다. 조선인 특유의 불치병이라 할 수 있는 진영싸움이 그곳에서도 벌어졌던 셈이다.
열도 내에서 백제계끼리의 싸움이 벌어지고, 나카노오에 황자가 권력을 잡은 시점인 660년, 백제는 당나라를 등에 업은 신라의 기습으로 결국 멸망한다. 당시 웅진성의 장수 예식진의 배반이 결정적이었다. 웅진성의 지정학적 요충성을 생각하면 쉽게 무너질 곳은 아니었지만, 백제는 하루아침에 항복하고 만다.
3년 후인 663년, 35대와 37대 천황이자 일본 최초로 두 번 재위한 여자 천황 사이메이(제명)는 사촌 동생인 의자왕을 구원하기 위해 일본 국력을 총동원해 백제 원정군을 조직했다. 원정군의 규모는 2만 7,000여 명. 열도에 살던 백제계 주민이 다수 동원되었을 것이다.
사이메이 천황은 2년에 걸쳐 군사를 모으고, 1천 척의 배를 건조해 규슈 아사쿠라 지역으로 향했다. 많은 백제인을 포함한 부흥군의 사기는 높았다. 그러나 사이메이 천황은 원정을 앞두고 급서했다. 향년 68세. 나이도 많았지만, 원정을 반대하던 정적에게 독살당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오사카의 나니와(難波)성(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험한 파도’라는 뜻으로, 백제계가 사는 정치의 중심지를 의미함)에서도 원정 반대 목소리가 높았다. 나카노오에 황자는 어머니 사이메이 천황을 ‘제명제고장지’라는 곳에서 임시 매장한 후 초가를 얹은 헛간에서 열이틀 동안 상주로 장례를 치렀다.
앞서 언급했듯 일본에 있던 백제 부흥군은 부여풍을 왕으로 세웠으나, 복신과의 권력 다툼으로 사기가 떨어졌고, 금강 일대에서는 1천 척 중 600척이 침몰하는 참패를 겪었다. 주류성 전투에서도 실패했고, 부여풍은 고구려로 달아났으며, 임존성에서 저항하던 일부 부흥군도 백제 장수 흑치상지의 배신으로 결국 항복하고 만다.

사이메이 천황이 일으킨 백촌강 전투는 일본 역사에서도 큰 의미를 갖는 사건이다. 가야인의 후손이며, 일본 씨름(스모)의 기원으로 알려진 하세(土師) 씨 가문 출신으로, 다자이후의 귀족이자 학문의 신으로 추앙받는 스가하라 미치자네는 죽기 전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긴다:
“유심히 보면 도부루(都府樓)의 기와가 보이고 자세히 귀 기울이면 희미하게 관세음사(觀世音寺)의 종소리가 들려오네”
‘도부루’는 사이메이 천황이 백제 원정을 위해 규슈에 임시로 세운 아사쿠라 궁을 의미하고, ‘관세음사’는 그녀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찰이다. 이 사찰의 범종은 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고 전해지는 국보다. 학문의 신 스가하라 미치자네 역시 백촌강 전투의 상처를 간직하고 이 시를 지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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