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쿄 북쪽에 자리한 사이타마현. 도쿄 대도시권에 포함되며, 도쿄 중심부로부터 최단 거리는 약 12km. 인구는 730여 만 명이다. 이곳은 토지가 비옥한 관계로 관동지방의 식량 생산을 담당해 왔다.
2025년 3월 28일 새벽, 『주간평택』 독자 10명은 김옥균의 발자취와 고구려 유민의 흔적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사이타마현의 고마 신사를 둘러보기 위해 평택을 떠났다.
언제나 그렇듯 도쿄는 관광객들로 붐볐다. 전 세계 유명 관광지가 오버투어리즘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고 하는데, 일본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일본 역사에 관심이 많은 한국과 중국인들로 인해 도쿄는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미국 달러에 대한 엔화 약세의 여파로 물가가 급격히 올랐음에도, 관광객의 발길은 줄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특단의 대책으로 호텔비를 인상하고 관광지 입장료도 올려 보았지만, 일본에 대한 관심은 도무지 줄어드는 기색이 없었다.
필자 일행이 방문한 아사쿠사의 센소지 사찰에는 쌀쌀한 날씨에도 구름 같은 인파가 어깨를 부딪치며 걷고 있었다. 중국인, 한국인, 영국인, 미국인 등 다양한 국적의 목소리들이 모여든 혼잡한 현장이었다.

센소지 사찰은 백제계 어부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도쿄에서 가장 오래된 절인 이곳은 654년, 어부로 살아가던 두 형제가 스미다강에서 그물을 걷어 올리던 중 불상을 건지게 되며 역사가 시작된다. 사찰이 커지자 이를 관리할 사람이 필요해졌고, 그들에게는 사찰 앞에서 노점을 열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다. 이곳이 바로 ‘나카미세도리’ 노포 거리다. 약 250m에 이르는 거리 양편에는 온갖 진귀한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어 관광객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도쿄에서 반드시 한 번쯤 방문해야 할 코스다.

사이타마현의 ‘작은 에도’ 가와고에라는 에도 시대 당시의 거리가 잘 보존되어 있는 도시가 있다. 과거의 일본으로 시간 여행을 떠난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예스러운 매력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특히 ‘시간의 종탑’(도키노카네)은 가와고에의 상징적 명소로 포토존으로 유명하다. 400년 전에 만들어졌으나, 여러 차례 화재로 소실되었고 현재의 것은 1893년에 재건한 것이다. 가와고에의 ‘과자 거리’ 역시 에도 시대의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는 완벽한 장소다. 특히 한 과자 가게 앞은 문을 열기도 전에 관광객들이 줄을 서 있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한다.

편의점에서 점심을 사 들고, 드디어 우리의 이번 여행 목적지인 고마 신사에 도착했다. 고마 신사(고려 신사) 또는 고구려 신사는 고구려 유민과 함께 고마 군을 개척한 고구려의 충신 약광(若光)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663년 백제가 멸망하자, 고구려 왕 보장왕은 아들 약광에게 일본으로 건너가 군사 지원을 요청하라고 명령했다. 오랜 항해 끝에 도착했지만, 668년 고구려는 신라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이후 고구려 왕족과 많은 유민이 일본으로 망명했고, 그들은 시즈오카의 고려산 부근과 야마나시현, 치바현, 도치기현 등지로 흩어져 살게 되었다.
약광은 일본의 협조를 얻어 716년, 고구려 유민 1,799명을 이곳 고마 신사 부근에 모여 살게 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고구려인들은 그를 ‘고마명신’으로 추앙하며 신사를 세웠다.

‘출세하고 싶으면 고마 신사에 가서 기도하라’는 일본 속설이 있다. 고마 신사는 일본 정치인들의 필수 참배 코스다. 실제로 6명의 일본 총리가 이곳을 참배한 후 총리에 올랐다고 하여 ‘출세 명신(出世明神)’이라 불리기도 하며, “큰 사건이 있을 땐 고마 신사에 가서 빌어야 수사가 잘 풀린다”는 이야기도 있어 경시청과 도쿄지검의 검사들도 줄줄이 찾는다고 한다.
연간 40만 명 이상의 참배객이 찾는 이곳에는 유명인사와 연예인의 발길도 끊이지 않는다.
필자가 방문했을 당시, 대한민국은 대통령 탄핵 사태로 국론 분열이 극심했던 시기였다. 나라를 망쳐놓은 진영 논리는 구한말의 재현과도 같았다. 필자를 포함한 기성세대의 끝없는 욕심과 몰지각으로 인해 국운의 날개는 꺾여나가고 있었다.
답답한 마음으로 고마 신사를 찾았을 때, 혼자 온 듯 보이는 한 청년이 말을 걸어왔다.
“한국에서 오셨어요?”
한국인이 찾기엔 다소 외진 곳이라, 처음엔 한국어를 잘하는 일본인인가 싶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한국인이라고 소개했고, 놀랍게도 그의 아버지는 평택고등학교 29회 졸업생이었다. 외가는 죽백동이며 외할아버지는 지금도 건강히 잘 지내신단다. 가족을 만난 듯 무척 반가웠다.
그는 30살. 장교로 군 복무를 마치고, 대학 재학 중 교환학생으로 만났던 일본 여자친구를 다시 만나기 위해 일본을 찾았다고 한다. 고마 신사가 마음이 편해 기도하러 종종 들르는데 이번이 벌써 다섯 번째란다.
일본 역사에도 밝은 그는, 한반도와 연관된 꼭 가봐야 할 곳들을 소개해주었다. 백제계인 고야 신립, 50대 간무 천황의 어머니에 대해 설명해주었는데, 이 고야 신립은 아키히토 천황이 2001년 생일 기자회견에서 언급했던 백제 무령왕의 후손이었다.
고마 신사의 궁사는 현재 약광왕의 54대 손이라 한다. 청년은 그를 만나기 위해 사찰 내를 분주히 오갔다. 궁사는 출타 중이었고, 대신 젊은 신관이 우리를 맞이했다. 청년은 우리를 약광왕의 묘소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전직 대한민국 총리 김종필 씨가 심은 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한국 정치의 회복을 기원하며, 우리는 약광왕 묘 앞에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청년의 간절함이 우리보다 더 커 보였다. 구태에 빠진 정치 현실, 무관심과 체념 속에 가라앉은 사회. 대한민국은 망할 것 같았지만, 그 청년의 단단한 눈빛과 또렷한 각오에서 실낱같은 희망 하나를 보았다.
참으로 의미 깊은 일본 방문이었다.
'오피니언 > 칼럼·기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손동주 칼럼] 그곳에 가면 - 용인 은이성지(김가항 성당) (0) | 2025.04.08 |
---|---|
[강민경의 뇌과학연구소]12장. 처음 꺼내본, 마음 한 조각 (0) | 2025.04.08 |
[이수연의 一寫一言]사람들은 왜 가면을 쓸까요? (0) | 2025.04.08 |
[논평] 이병진 국회의원(평택시을) 당선무효형 선고 입장 (0) | 2025.04.03 |
[양금석 칼럼 - 선거이야기 59] 그 뜨거움 (0) | 2025.04.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