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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칼럼·기고

[최인규칼럼] 일본을 걷다

by 주간평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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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 기요마사(임진왜란 당시 선봉에 선 장수)는 선조의 두 아들 임해군과 순화군을 생포했다. 아니 조선백성 국경인 (선조시기의 매국노)의 도움으로 거저 얻었다.

도쿄의 각림사. 이 절은 항왜인 사야가의 대장였던 가토 기요마사를 모시는 절로 임해군의 아들이자 일연종의 큰 스님 일연상인이 주지로 있던 곳이다. 사찰 내에는 일연스님의 흔적이 서려있다. 특히 일연스님이 목판에 새긴 시가 간직되어있다.

두 왕자는 무척 난폭했다. 군사를 모으기 위해 함경도 지방으로 다니면서 백성을 죽이기도 하고 여인을 겁탈하기도 했다. 보다 못한 국경인 등 함경도 주민은 그들을 사로잡아 일본 장수에게 갖다 바친 것이다. 이때 임해군의 아들과 딸도 함께 포로가 되었다.

임해군의 아들은 일연종의 큰 스님이 되어 도쿄 각림사의 주지가 되는 등 일본 불교계에 커다란 족적을 남기신 분이다.  가토 기요마사의 도움이 컸던 모양이다. 불교신자인 가토는 진주 부근에서 어린 소년 여대남도 납치하여 구마모토 혼묘지(本妙寺)에서 일요상인이라는 큰 스님이 되도록 지원하기도 했다.

선조의 장손 일연스님은 가토 기요마사에게 끄려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는 도쿄의 각림사 주지도 역임했다. 경내에는 그의 이야기를 설명한 안내판이 놓여있다.

국경인처럼 일본군에 협조한 순왜군과는 달리, 조선에 협조한 일본군, 이른바 항왜군도 1만 명 가까이 있었다. 약 120년 동안 이어진 센고쿠 시대가 종식되면서, 일본의 중간급 사무라이들은 더 이상 '전쟁병기'로서의 역할이 필요 없게 되었고, 이들의 용도폐기가 시작되었다.

그들은 드디어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 기대했지만,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임진왜란) 소식은 그런 기대를 완전히 꺾어버렸다. 명분도 없고, 얻을 것도 없는 전쟁에 끌려가야 했던 사무라이들은 전쟁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고, 조선과 싸우는 것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루이스 프로이스(포루투갈 출신의 선교사)가 ‘일본군은 조선군과 싸우다 죽은 자는 적고 대부분 단순 노역이나 기아 및 추위, 질병으로 죽었다’라고 보고한 자료에 나와 있듯이 성질 포악한 다이묘를 모셨거나 일이 고되어 도망나온 자들도 많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조선에 도착하자 곧 바로 투항을 했다. 포로가 되기 전에 조선으로의 귀화를 결정했던 것이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은 사야가. 그는 오사카 옆의 와카야마 출신으로 가토 기요마사의 우선봉장이었다.

귀화한 그는 조총 만드는 기술을 조선에 전수했다. 그의 노하우 전수는 임진왜란을 견딜수 있는 많은 원동력 중 하나임은 분명했다. 이순신장군과도 서신을 주고 받았는데, 여러 분야에서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정유재란때는 의령전투에서 활약했고 가토 기요마사와의 울산성 전투에서는 공을 세우기도했다. 권율장군의 주청으로 선조로부터 김충선(金忠善: 충성스럽고 착한 신하라는 뜻)이란 이름을 하사받았다.

암군(暗君) 선조는 귀순한 사무라이들만으로 항왜군 독립부대를 조직해 북방 여진의 반란을 토벌하는데 이들을 이용했다. 좁쌀 왕답게 선조는 항왜군을 부담스러워해 북방으로 보냈던 것이다.

인조반정 후,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은 1624년 왕가 종실 흥안군을 옹립하며 난을 일으킨다. 북방에 있으며 찬밥 신세였던 항왜인들은 이때다 싶어 이괄의 난에 합류해 선봉에 서서 관군과 싸웠다.

항왜군을 데리고 신속하게 한양을 향해 진군한 이괄부대는 무악재에 다다르자 ‘큰 싸움이 있으니 구경하고 싶은 자는 모두 모여라’라는 방을 붙였고 많은 백성이 무악재 옆 바위위에 걸터 앉아 술을 마시며 관군과 이괄의 군대 누가 이기는지 싸우는 것을 즐겼다.

인조는 진즉 공주 공산성으로 도망갔으니 임자 없는 나라나 다름 없었기에 백성 모두가 체념상태로 어떤 도둑놈이 나라를 차지해도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선조나 광해군이나 인조나 훗날의 정치꾼을 모두 오십보 백보, 한치도 틀림이 없는 흡혈귀로 본 것일게다.

특히 광해군의 친 후금정책을 이유로 반정을 일으킨 인조는 공주로 도망가기도 했고, 정묘호란때는 강화도로, 병자호란때는 남한산성으로 도망질만 한 암군이었다. 게다가 그자는 병자호란 후 청나라에 유배 중에 격변하는 세상을 깨우치고 귀국한 아들 소현세자와 세자비 그리고 손자까지 죽인 패륜왕이었고 세 번씩이나 백성과 서울을 버리고 도주한 겁쟁이였다. 도대체 왜 임금이 될려고 난리를 떨었던 건지.

이괄의 난 당시 크게 활약한 항왜군 중 무예가 뛰어나고 포악한 자가 있었는데 서아지라는 항왜인이었다. 그때 김충선이 서아지의 목을 베었다 한다. 한국 드라마에도 가끔 나오는 장면이다. 김충선은 병자호란때도 큰 활약을 했지만 조선이 항복하자 통곡하였다 하며 그후 달성군 우록동에 은둔하여 여생을 보냈다.

그의 이야기는 필자가 존경하는 일본 작가 ‘시바 료타로’가 쓴 ‘가도를 가다. 한국기행’에 소개되면서 일본에도 널리 알려졌고 해마다 1,000여 명 이상의 일본인이 우록동을 찾아오고 있다. 선조가 김충선에게 하사한 사성 김해 김씨는 오늘날에도 이어지는데 법무부장관을 역임했던 김치열장관이 그의 후손이다.

어영청 소속 어영군이 우록마을에 주둔했다. 어영청은 이괄의 난 당시 인조를 호위하기 위해 창설된 군대였다. 우록마을에서 조총생산과 훈련이 목적이었고 비상시에는 한양으로 올라가 어영청 소속으로 편입되는 부대였다. 아마 그다지 믿음직스럽지 않았나 보다. 어영부영이라는 단어가 여기서부터 나왔는데, 원래는 어영비영(御營非營)이었다. 군대도 아니라는 뜻이다. 김충선도 이곳에 소속되어 있었다.

부득이하게 일본으로 끌려가 사무라이로 성장한 조선인도 많았다. 역시 가토 기요마사에게 포로로 끌려가 큰 스님이 된 여대남. 그는 일요스님이 되어 가토를 모시는 구마모토의 혼묘지(本妙寺)의 주지가 되는데, 그 절에는 이순신장군이 직접 지은 시와 여대남이 조선에 아직 살아계신 부모에게 보낸 편지, 하루 만에 7만 자를 썼다는 법화경, 그리고 일요스님의 초상화, 가토 기요마사의 유골, 매년 7월 23일에만 볼 수 있다는 가토 목각상 등이 보관되어 있다. 여대남이 아버님에게 보낸 편지에는 대마도로 끌려간 선조의 딸 이연왕희의 처참한 이야기도 실려있다.

경남 산청군에서도 어린 소년 홍호연이 끌려갔다. 홍호연은 훗날 서예가로 우뚝섰다. 교토 정법사(頂法寺) 현판, 시모노세키 소산사 현판은 그의 작품이다. 사가현 나고야성 박물관에는 홍호연 족자와 초상화가 놓여있다.

홍호연. 그는 훗날 서예가로 우뚝섰다. 교토 정법사(頂法寺) 현판, 시모노세키 소산사 현판은 그의 작품이다. 사가현 나고야성 박물관에는 홍호연 족자와 초상화가 놓여있다.

 

홍호연은 죽을때까지 참을 인(忍)을 마음속에 새기며 살았다. 조선으로의 귀국을 허락하지 않자 다이묘가 죽을 때 함께 목숨을 버렸다.

사가현 고덴지에는 그를 끌고 간 나베시마 가문의 무덤이 있다. 그 한켠에는 나베시마가 죽을 때 함께 순사한 사무라이들의 비석이 조성되어 있는데 그 중에는 운해거사 홍호연의 비석도 함께 있다. 그 또한 그를 납치해간 영주를 위해 순사를 한 것이다.

교토 정법사(頂法寺) 현판, 시모노세키 소산사 현판은 그의 작품이다. 사가현 나고야성 박물관에는 홍호연 족자와 초상화가 놓여있다.

경남 산청군 오부면 중촌마을에는 남양홍씨 집성촌이 있는데 홍호연에 대한 유적을 만들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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